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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하아……. 언제까지 안으실 겁니까?”
“알았어요. 제가 나중에 작게 사례라도 할게요.”
시선은 민준에게 고정한 채, 해라가 말했다. 뒤이어 남자가 말했다.
“됐습니다. 그냥 액땜했다 생각할 테니.”
액, 액땜? 냉정한 어조에 해라가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은 마스크로 가려져 있어 잘 볼 수 없었다.
남자는 해라를 제 품에서 차갑게 떼어 놓더니, 이내 그녀를 지나쳤다.
“허!”
내쳐진 해라는 절로 울컥해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남자의 냉정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울컥하고 화를 낼 순 없었다.
“아오, 내가 어쩌다가.”
민준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해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 가, 자기야!”
해라는 감정을 추스르고 밝게 웃으며 번쩍 손을 들어 휘저었다. 그리고 행여 남자가 들었을까 싶어 얼른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턱을 들었다. 도도한 눈빛으로 카페 안을 훑었다.
“……어, 해라야. 여기!”
민준이 그녀를 반겼다. 오랜만에 쓰레기의 면상을 보니 벌써부터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직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나 해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가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미안, 갑자기 보자고 해서.”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3개월 전엔 절대 안 볼 것 같은 사람처럼 쌀쌀맞더니, 달라진 민준의 태도가 믿기지 않았다. 해라는 흘깃, 민준의 옆에 앉은 수연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언니.”
어쭈, 이년 봐라. 수연은 해라와 눈이 탁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눈웃음을 흘렸다.
언니? 참나, 얼굴도 두꺼워라. 해라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본론부터 말해. 나 작업해야 하니까.”
“어…… 그러니까. 미안해, 해라야.”
설설 기는 민준이 아니꼬웠다. 차라리 평소처럼 화내지 그러냐? 해라가 물었다.
“그러니까 왜 미안한데. 우리가 아직도 사귀니?”
“……그, 그건 아니지.”
그럼 양심이 좀 있어 보렴. 한마디 할까 하다가 해라는 꾹 참았다. 보는 시선이 있었기에.
“……그. 그게.”
바짝 마른 입술에 침까지 묻혀 가며 말을 더듬는 민준에 해라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언니, 실은…….”
그 순간, 수연의 말에 해라는 놓으려는 이성의 끈을 일단 붙잡았다.
뭐? 해라가 되물었다.
“아, 언니, 집필은 잘하고 계세요? 저 몰랐어요. 작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드라마까지 하신 줄은. 민준 오빠한테 다 들었어요.”
“그래서 뭐.”
테이블 아래에 놓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민준을 노려보자 그는 고개만 숙였다.
“사실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언니한테…….”
“수연아, 우리 이런 말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보다 못한 민준이 수연을 말리려 들었다. 해라는 수연을 빤히 바라보며 냉정을 유지했다.
“제가 진짜 이런 말 할 처지 안 되는 거 알지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야!”
결국 해라가 소리쳤다. 붉은 원피스가 더 붉어질 지경이었다.
“네 처지가 어떤지는 아나 보네?”
해라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더 듣다가는 귀가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아 말을 끊었다.
“네?”
“해라야, 그러니까…….”
헤실헤실 잘 웃던 수연의 태도가 해라의 말 한마디에 싸악 바뀌었다. 두 여자 사이엔 적대감이 냉랭하게 흘렀다. 제일 난처한 건 두 여자 사이에 낀 민준이었다.
“아이 씨, 진짜. 넌 좀 빠져! 사람이 할 말이 있고, 하면 안 되는 말이 있지. 너 뭐라 했어?”
겨우겨우 참고, 붙잡고 있는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화가 났다.
작가였던 거 뻔히 알면서 몰랐다며 새빨간 거짓말을 해 오는 뻔뻔한 고수연이 짜증이 났고, 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 강민준을 사랑했단 사실이 화났다.
해라가 이를 으득 갈며 두 사람에게 강하게 응수했다.
“너희들, 바람피운 거야. 고수연 넌, 내 애인 뺏은 년이라고. 알아?”
“…….”
“근데 나한테 3개월 만에 연락 와서, 뭐? 다리 좀 놓아 달라고? 내가 미쳤니?”
이성을 유지하려 애를 썼으나, 감정은 곤두박질쳤다.
안 그래도 강민준만 보면 그 액운이 생각나 미칠 것 같았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해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민준. 오늘 일 없던 걸로 할게.”
해라가 차갑게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해라야, 미안하다.”
그래도 쓰레기 중에 양심은 남아 있는 듯 민준이 해라에게 재차 사과를 해 왔다.
그러나 수연은 해라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
아직도 자기 주제를 모르는 저 어린 양이 불쌍했다.
“수연아, 얼른 크렴. 힘이 없으니까. 네 애인 전 여친한테까지 빌빌거리니?”
“언니! 빌빌거리다니요. 말이 좀…….”
자존심은 상하는지 수연의 표정이 일순 사나워졌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니?”
해라가 아무렇지 않게 맞받아치자, 수연이 바로 태도를 바꾸며 말했다.
“아, 아니 언니. 진짜 저 다 내려놓을게요. 일단 제발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뭐?”
저 뻔뻔한 낯짝 좀 보게. 당당하게 부탁을 들어달라는 수연의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언니, 민준 오빠 없어도 잘나가잖아요. 저 한 번만 도와줘요. 언니도 제가 쓴 글 좋다고 칭찬해 주셨잖아요.”
그때, 보다 못한 민준이 소리치며 수연을 제지했다.
“고수연! 이제 그만하라니까!”
이렇게 개연성 없는 여자애는 또 처음 봤다. 화낼 힘조차 없었다.
해라가 실소를 터트렸다.
“……참나, 얻다 대고 언니래, 전국에 계신 언니들 짜증 나게.”
수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해라의 앞에 섰다. 뻔뻔하다 못해 얄미운 수연의 태도가 해라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은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나? 수연을 내려다보았다.
기고만장한 태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저 뻔뻔함.
“그래, 네 글 좋았지. 근데 이렇게는 아냐. 나한테 부탁한다고 해서 네가 뭘 얻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마음으로 네가 오래 갈까?”
“뭐?”
수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린다. 민준은 두 여자 사이에서 난처한 듯 한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수연이 겨우 제 감정을 다잡고 다시 말했다.
“진짜 염치 불구하고 아는 인맥이 언니밖에 없어요. 그래도 저희 친했잖아요.”
들려오는 말에 해라가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미친.”
“돈이 얼마가 됐든 상관없어요. 제발요, 언니. 저 한번만 도와주세요. 알잖아요, 저도 언니처럼 되고 싶어 했다는 거.”
수연이 스무 살 때였다. 민준의 소개로 처음 만난 수연은 순수하고, 맑았다. 꿈 많고, 열정적인. 비록 자기와 나이차가 꽤 나는 동생이었지만, 문학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해라는 수연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떠한 위험도 없었다. 설마 했던 수연이 민준과 사랑에 빠질 줄은 몰랐으니까. 친했던 동생과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얻은 이별과 배신은 잘나가던 해라의 삶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친했으니까 더더욱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수연아.”
“…….”
해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핸드백 안에 있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돈이 얼마가 됐든, 그게 억이 되었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언니 돈 많아, 수연아.”
해라가 지폐를 꺼내 들며 활짝 웃었다. 곱게 지폐를 펴 소리 나게 테이블에 놓았다.
“맞다. 결혼 소식 들었어.”
“……해라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해라가 물이 담긴 컵을 들어 테이블에 놓인 지폐에 쭈욱 들이부었다.
“뭐 하는 거야?”
“언니! 아, 진짜!”
민준이 놀라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라는 활짝 웃었다. 민준이 첫눈에 반했던 그 미소였다.
“이건 내 축의금. 결혼식은 못 갈 거 같아서.”
그 말을 끝으로 해라는 벙찐 두 사람을 지나쳐 도도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 오빠! 어떻게 좀 해 봐! 나만 당하고 이게 뭐야?”
뒤에서 민준과 수연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 해라는 기쁨의 조소를 지었다.
“……진짜 저런 성격이니까 남자나 뺏기고 다니지.”
그리고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어 버렸다. 해라가 천천히 뒤를 돌아 기다렸다는 듯 저를 노려보고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너,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수연이 팔짱을 낀 채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해라의 열을 올렸다.
“들으셨나 봐요?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데. 워낙 언니가 남의 말은 절대 안 듣는 성격이라, 이번에도 안 들으실 줄 알았…… 악!”
조신하게 대해 주려 했더니, 수연은 기어이 선을 넘어 버린다. 해라가 빠르게 다가가 아직 반쯤 남은 물을 수연의 얼굴에 확 들이부었다.
“이게 진짜, 확.”
해라는 수연의 생각만큼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조언도 해 주고 잘 대해 주었던 선배 해라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수연아!”
민준이 수연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부축했다. 해라가 한숨을 푸, 내쉬며 두 사람에게 일갈했다.
“한 번만 더 나한테 연락하고 되도 않은 부탁 하기만 해 봐! 그땐 물로 안 끝날 테니까.”
해라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억울하다며 난리를 떠는 두 사람을 지나쳐 카페를 벗어났다. 해라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배신과 함께 온 후폭풍은 너무 거셌다. 그래도 나름 정 간 동생과 꽤 오랜 시간 사랑했던 친구이자 애인이었던 사람.
동시에 두 사람을 잃었다. 한 사람을 망가뜨려 놓고 오래 갈까? 퍽이나.
그렇게 해라는 모든 감정을 무너뜨린 채 연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술 마시러 가자. 어, 근처로 와.”
그 말과 동시에, 툭. 미련의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앞으로도 쭉.
***
밤 11시. 한창 재미 보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신 탓에 로비에 들어선 해라의 걸음걸이는 엉망진창이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이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끅.”
얼마 안 가 19층에 도착하고, 해라는 그 잠시 동안의 멀미로 속이 울렁거렸다.
……아, 토 나올 거 같아.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도 잘 마시지도 않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술이 없으면 하루가 너무나도 길 것 같았다. 특히나 그 염장들을 보니 점심에 먹은 음식은 소화도 안 됐다.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파 왔다. 비틀거리며 해라가 도어락을 열었다.
삑, 삑.
“뭐야. 왜 안 돼? ……아이 씨.”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정신은 멀쩡했다. 해라가 반쯤 풀린 눈으로 도어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우리 집 문이 원래 이렇게 깨끗했나. 두 눈을 깜빡이며 벅벅 비볐다.
“하아……. 언제까지 안으실 겁니까?”
“알았어요. 제가 나중에 작게 사례라도 할게요.”
시선은 민준에게 고정한 채, 해라가 말했다. 뒤이어 남자가 말했다.
“됐습니다. 그냥 액땜했다 생각할 테니.”
액, 액땜? 냉정한 어조에 해라가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은 마스크로 가려져 있어 잘 볼 수 없었다.
남자는 해라를 제 품에서 차갑게 떼어 놓더니, 이내 그녀를 지나쳤다.
“허!”
내쳐진 해라는 절로 울컥해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남자의 냉정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울컥하고 화를 낼 순 없었다.
“아오, 내가 어쩌다가.”
민준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해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 가, 자기야!”
해라는 감정을 추스르고 밝게 웃으며 번쩍 손을 들어 휘저었다. 그리고 행여 남자가 들었을까 싶어 얼른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턱을 들었다. 도도한 눈빛으로 카페 안을 훑었다.
“……어, 해라야. 여기!”
민준이 그녀를 반겼다. 오랜만에 쓰레기의 면상을 보니 벌써부터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직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나 해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가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미안, 갑자기 보자고 해서.”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3개월 전엔 절대 안 볼 것 같은 사람처럼 쌀쌀맞더니, 달라진 민준의 태도가 믿기지 않았다. 해라는 흘깃, 민준의 옆에 앉은 수연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언니.”
어쭈, 이년 봐라. 수연은 해라와 눈이 탁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눈웃음을 흘렸다.
언니? 참나, 얼굴도 두꺼워라. 해라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본론부터 말해. 나 작업해야 하니까.”
“어…… 그러니까. 미안해, 해라야.”
설설 기는 민준이 아니꼬웠다. 차라리 평소처럼 화내지 그러냐? 해라가 물었다.
“그러니까 왜 미안한데. 우리가 아직도 사귀니?”
“……그, 그건 아니지.”
그럼 양심이 좀 있어 보렴. 한마디 할까 하다가 해라는 꾹 참았다. 보는 시선이 있었기에.
“……그. 그게.”
바짝 마른 입술에 침까지 묻혀 가며 말을 더듬는 민준에 해라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언니, 실은…….”
그 순간, 수연의 말에 해라는 놓으려는 이성의 끈을 일단 붙잡았다.
뭐? 해라가 되물었다.
“아, 언니, 집필은 잘하고 계세요? 저 몰랐어요. 작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드라마까지 하신 줄은. 민준 오빠한테 다 들었어요.”
“그래서 뭐.”
테이블 아래에 놓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민준을 노려보자 그는 고개만 숙였다.
“사실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언니한테…….”
“수연아, 우리 이런 말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보다 못한 민준이 수연을 말리려 들었다. 해라는 수연을 빤히 바라보며 냉정을 유지했다.
“제가 진짜 이런 말 할 처지 안 되는 거 알지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야!”
결국 해라가 소리쳤다. 붉은 원피스가 더 붉어질 지경이었다.
“네 처지가 어떤지는 아나 보네?”
해라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더 듣다가는 귀가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아 말을 끊었다.
“네?”
“해라야, 그러니까…….”
헤실헤실 잘 웃던 수연의 태도가 해라의 말 한마디에 싸악 바뀌었다. 두 여자 사이엔 적대감이 냉랭하게 흘렀다. 제일 난처한 건 두 여자 사이에 낀 민준이었다.
“아이 씨, 진짜. 넌 좀 빠져! 사람이 할 말이 있고, 하면 안 되는 말이 있지. 너 뭐라 했어?”
겨우겨우 참고, 붙잡고 있는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화가 났다.
작가였던 거 뻔히 알면서 몰랐다며 새빨간 거짓말을 해 오는 뻔뻔한 고수연이 짜증이 났고, 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 강민준을 사랑했단 사실이 화났다.
해라가 이를 으득 갈며 두 사람에게 강하게 응수했다.
“너희들, 바람피운 거야. 고수연 넌, 내 애인 뺏은 년이라고. 알아?”
“…….”
“근데 나한테 3개월 만에 연락 와서, 뭐? 다리 좀 놓아 달라고? 내가 미쳤니?”
이성을 유지하려 애를 썼으나, 감정은 곤두박질쳤다.
안 그래도 강민준만 보면 그 액운이 생각나 미칠 것 같았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해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민준. 오늘 일 없던 걸로 할게.”
해라가 차갑게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해라야, 미안하다.”
그래도 쓰레기 중에 양심은 남아 있는 듯 민준이 해라에게 재차 사과를 해 왔다.
그러나 수연은 해라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
아직도 자기 주제를 모르는 저 어린 양이 불쌍했다.
“수연아, 얼른 크렴. 힘이 없으니까. 네 애인 전 여친한테까지 빌빌거리니?”
“언니! 빌빌거리다니요. 말이 좀…….”
자존심은 상하는지 수연의 표정이 일순 사나워졌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니?”
해라가 아무렇지 않게 맞받아치자, 수연이 바로 태도를 바꾸며 말했다.
“아, 아니 언니. 진짜 저 다 내려놓을게요. 일단 제발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뭐?”
저 뻔뻔한 낯짝 좀 보게. 당당하게 부탁을 들어달라는 수연의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언니, 민준 오빠 없어도 잘나가잖아요. 저 한 번만 도와줘요. 언니도 제가 쓴 글 좋다고 칭찬해 주셨잖아요.”
그때, 보다 못한 민준이 소리치며 수연을 제지했다.
“고수연! 이제 그만하라니까!”
이렇게 개연성 없는 여자애는 또 처음 봤다. 화낼 힘조차 없었다.
해라가 실소를 터트렸다.
“……참나, 얻다 대고 언니래, 전국에 계신 언니들 짜증 나게.”
수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해라의 앞에 섰다. 뻔뻔하다 못해 얄미운 수연의 태도가 해라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은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나? 수연을 내려다보았다.
기고만장한 태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저 뻔뻔함.
“그래, 네 글 좋았지. 근데 이렇게는 아냐. 나한테 부탁한다고 해서 네가 뭘 얻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마음으로 네가 오래 갈까?”
“뭐?”
수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린다. 민준은 두 여자 사이에서 난처한 듯 한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수연이 겨우 제 감정을 다잡고 다시 말했다.
“진짜 염치 불구하고 아는 인맥이 언니밖에 없어요. 그래도 저희 친했잖아요.”
들려오는 말에 해라가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미친.”
“돈이 얼마가 됐든 상관없어요. 제발요, 언니. 저 한번만 도와주세요. 알잖아요, 저도 언니처럼 되고 싶어 했다는 거.”
수연이 스무 살 때였다. 민준의 소개로 처음 만난 수연은 순수하고, 맑았다. 꿈 많고, 열정적인. 비록 자기와 나이차가 꽤 나는 동생이었지만, 문학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해라는 수연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떠한 위험도 없었다. 설마 했던 수연이 민준과 사랑에 빠질 줄은 몰랐으니까. 친했던 동생과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얻은 이별과 배신은 잘나가던 해라의 삶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친했으니까 더더욱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수연아.”
“…….”
해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핸드백 안에 있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돈이 얼마가 됐든, 그게 억이 되었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언니 돈 많아, 수연아.”
해라가 지폐를 꺼내 들며 활짝 웃었다. 곱게 지폐를 펴 소리 나게 테이블에 놓았다.
“맞다. 결혼 소식 들었어.”
“……해라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해라가 물이 담긴 컵을 들어 테이블에 놓인 지폐에 쭈욱 들이부었다.
“뭐 하는 거야?”
“언니! 아, 진짜!”
민준이 놀라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라는 활짝 웃었다. 민준이 첫눈에 반했던 그 미소였다.
“이건 내 축의금. 결혼식은 못 갈 거 같아서.”
그 말을 끝으로 해라는 벙찐 두 사람을 지나쳐 도도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 오빠! 어떻게 좀 해 봐! 나만 당하고 이게 뭐야?”
뒤에서 민준과 수연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 해라는 기쁨의 조소를 지었다.
“……진짜 저런 성격이니까 남자나 뺏기고 다니지.”
그리고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어 버렸다. 해라가 천천히 뒤를 돌아 기다렸다는 듯 저를 노려보고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너,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수연이 팔짱을 낀 채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해라의 열을 올렸다.
“들으셨나 봐요?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데. 워낙 언니가 남의 말은 절대 안 듣는 성격이라, 이번에도 안 들으실 줄 알았…… 악!”
조신하게 대해 주려 했더니, 수연은 기어이 선을 넘어 버린다. 해라가 빠르게 다가가 아직 반쯤 남은 물을 수연의 얼굴에 확 들이부었다.
“이게 진짜, 확.”
해라는 수연의 생각만큼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조언도 해 주고 잘 대해 주었던 선배 해라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수연아!”
민준이 수연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부축했다. 해라가 한숨을 푸, 내쉬며 두 사람에게 일갈했다.
“한 번만 더 나한테 연락하고 되도 않은 부탁 하기만 해 봐! 그땐 물로 안 끝날 테니까.”
해라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억울하다며 난리를 떠는 두 사람을 지나쳐 카페를 벗어났다. 해라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배신과 함께 온 후폭풍은 너무 거셌다. 그래도 나름 정 간 동생과 꽤 오랜 시간 사랑했던 친구이자 애인이었던 사람.
동시에 두 사람을 잃었다. 한 사람을 망가뜨려 놓고 오래 갈까? 퍽이나.
그렇게 해라는 모든 감정을 무너뜨린 채 연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술 마시러 가자. 어, 근처로 와.”
그 말과 동시에, 툭. 미련의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앞으로도 쭉.
***
밤 11시. 한창 재미 보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신 탓에 로비에 들어선 해라의 걸음걸이는 엉망진창이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이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끅.”
얼마 안 가 19층에 도착하고, 해라는 그 잠시 동안의 멀미로 속이 울렁거렸다.
……아, 토 나올 거 같아.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도 잘 마시지도 않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술이 없으면 하루가 너무나도 길 것 같았다. 특히나 그 염장들을 보니 점심에 먹은 음식은 소화도 안 됐다.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파 왔다. 비틀거리며 해라가 도어락을 열었다.
삑, 삑.
“뭐야. 왜 안 돼? ……아이 씨.”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정신은 멀쩡했다. 해라가 반쯤 풀린 눈으로 도어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우리 집 문이 원래 이렇게 깨끗했나. 두 눈을 깜빡이며 벅벅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