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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녀는 계속 숨을 쉬는 데 주력했다. 숨소리만 존재하는 고요한 공간이 그의 목소리로 깨어졌다.
“우리.”
잠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목소리였다.
“오벨테로 가자.”
영주성이 있는 이 영지의 중심지. 그러기 싫어서 아등바등해 왔던 것인데. 카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쥬다의 속내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것으론 안 돼. 여기로는 안 돼. 너와 나로는 안 돼……. 그도 같은 생각을 해 왔음인가. 카리나는 가슴이 조금 아파 왔다.
“……그래.”
차마 그러기 싫다는 말을 뱉을 수가 없어, 정해진 답을 입 밖에 낸 그녀는 그러자마자 참을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느린 숲의 시간 속에 살던 그녀에겐 너무도 빠르게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벌써 몇 달 되지도 않는 사이 몇 개의 인형이 실패했으며 마침내는 한계를 인정하고 도시로 가기로 했다. 그녀는 통제할 수 없는 일의 흐름에 휩쓸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쥬다의 위에 올라타 키스를 퍼부었다. 잠시 멈칫하던 쥬다도 곧 혀를 휘감아 화답했다.
카리나는 불안을 토해 내는 것처럼 거칠게 쥬다의 혀를 옭아매었으나 곧 쥬다의 아래에 깔렸다. 헐떡이는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춘 쥬다의 손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가슴이 차가운 손에 잡히자 오싹한 감각이 발끝까지 내달렸다.
날카로운 칼 끝에 서 있는 것처럼 그녀는 조금의 여유도 느끼지 못하고 쥬다의 옷을 벗겼다. 여유가 없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쥬다도 카리나가 옷을 벗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거의 찢어질 듯이 벗겨진 옷이 침대 아래로 던져졌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두 사람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쥬다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화인을 찍듯 뜨겁게 눌렀다.
“으읏.”
쥬다의 머리를 감싸며 카리나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가슴을 간질이는 감각을 느꼈다. 평소의 다정한 손길이 아니었다. 쥬다가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자 카리나는 발끝을 쭉 펴고 그에게 가슴을 내밀었다. 거칠게 입술로 유두를 누르고 입 안으로 빨아 당긴 쥬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아…….”
아래를 꽉 채우며 들어오는 쥬다의 허리를 다리로 휘감으며 카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가득 찼던 불안이 하나가 되자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온전히 하나가 된 순간. 가슴이 기분 좋은 느낌으로 두근두근 뛴다. 한결 느긋해진 손으로 쥬다의 얼굴을 끌어당겨 혀를 섞었다.
“괜찮겠지?”
카리나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쥬다는 잠시 침묵하다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혀가 질척하게 입술을 핥자 카리나의 입에서 길게 신음이 터졌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쥬다가 거듭 반복하자 카리나가 그의 머리를 끌어안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알 수 없는 불안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쥬다가 강하게 허릿짓을 하자 카리나는 허리를 감은 다리에 힘을 주어 죄었다.
CH. 04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 사람, 사람. 사람이 없는 곳이 없다. 카리나는 기억을 할 수 있는 나이 이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은 일절 없이 그저 경계가 될 뿐이다. 카리나는 날 선 시선으로 주변의 행인을 관찰하며 적당한 숙박업소를 찾는 쥬다 옆에 바짝 다가섰다. 쥬다와 카리나는 누가 봐도 일행으로 볼 정도로 비슷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세세한 곳에선 약간 차이가 있었다.
마체르트와 달리 그들의 얼굴은 아직 소셀런스에게 알려지지 않아 변장은 아직 하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모자를 쓰지 않은 카리나와 달리 쥬다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의 상반이 가려졌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만류하는 쥬다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녀가 위험하다며 부득불 우긴 결과였다. 눈이 잘 보이지가 않으니 연신 모자의 챙을 꺾으며 앞을 확인하는 쥬다를 꿋꿋이 무시했다.
그녀는 세상 경험이 쥬다에 비해 턱없이 적긴 하지만 그래도 몇 번 마을에 내려가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같이 불쾌한 경험을 해야만 했고, 그건 모두 쥬다와 관련되어 있었다.
‘어머, 저분이 방금 널 본 것 같은데?’
‘안 돼. 나 지금 머리가 엉망이란 말야!’
가당치도 않은 착각과
‘웃겨. 누가 널 봤다니? 지금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저 계집애, 또 꼬리 친다.’
질시.
정작 쥬다는 그들이 무슨 얘길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저들끼리 싸움을 벌였다. 짚고 넘어갈 것은 그중에서 태연했던 건 쥬다뿐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의 눈총을 받던 어느 여자가 쥬다에게 윙크를 해 튀어 나갈 뻔한 카리나를 간발의 차로 잡아챈 쥬다가 씩씩거리는 그녀를 간신히 말렸다. 여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쥬다 옆의 카리나는 싹 무시해 그녀는 한순간에 투명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끝도 아니었다. 멀리서만 바라보는 것이 차라리 나은 상황들도 있었다.
‘여행자신가요? 저희 마을은 처음이시고요?’
마을의 홍보 위원장이라도 되는 것같이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말 거는 유형.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어디 묵을 데라도 있으신지. 저희 집이 여관을 하거든요.’
물질로 유혹해 대는 유형.
‘아직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 어떤가요?’
이런 유형은 정의 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뭘. 뭐가 어떤데?
‘꺄악! 이 여자 뭐야! 어디서 튀어나왔어? 사, 살려 주세요. 여행자님.’
머리가 사방으로 뜯기고 있는 와중에도 쥬다의 품에 안기려고, 밀지도 않았는데 스스륵 그의 품으로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꼴을 바라보고만 있을 카리나가 아니었다. 한바탕 누구도 못 말릴 개판이 벌어지고 난 뒤 카리나에게 남은 것은 애초에 목적했던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 대신 얼굴에 수놓아진 생채기뿐이었다. 그나마도 쥬다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누구 하나 죽었을 정도로 치열한 사생결단의 현장이었다.
이후 카리나가 쥬다를 마을에 고이 보내 주는 일은 없었다. 최대한 살이 보이지 않게 둘둘 말아 문 앞에서 보내는 시간만 10분이었다. 언젠가 그를 본 마체르트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다 쥬다가 숨 막혀서 죽겠다고 한마디 던진 덕분에 그 시간이 단축된 것이지,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화를 내지 않는 쥬다도 결국은 폭발했을 터였다.
카리나는 지금도 목도리로 모자 아래 드러난 하관을 가리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쥬다를 힐끔거렸다. 목도리를 할 만큼 덥지 않아 쥬다가 부드러우나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 못내 불만이었던 카리나는 그 때문에 말수가 줄어들었다. 나름대로 쥬다에게 시위하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괜히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니었다. 드러내 놓고 얼굴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쥬다도 얼굴이 사람들에게 인식되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 스스로도 조심하고 있기에 카리나는 쥬다를 믿고 일단은 마음을 놓았다. 다만 하루빨리 인피면구를 구해야겠다는 결심은 단단하게 굳어졌다.
마체르트가 곧잘 사용했던 건 쥬다에게 맞지 않으니 쥬다가 쓸 것으로 구해야 한다. 숙박을 알아보기 이전에 최우선으로 가면 장인을 찾아가고 싶건만, 일의 우선순위조차 모른 채 떼쓰는 꼴만은 면하려 그저 한숨만 푹푹 쉬었다.
“꼭 이렇게 중심지로 와야 돼? 외곽에 집을 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여긴 사람도 너무 많고, 번잡해.”
“네 말이 맞아.”
진의를 숨긴 카리나의 말에 쥬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머물 곳은 인적 드문 곳에 정해야겠지. 지금은 우리가 아는 게 너무 없으니까 정보 길드에 의뢰해야 해. 그러려면 수도의 여관에 묵는 게 좋고.”
마체르트가 남긴 기록에 의존해 쥬다는 정보 길드와 연결된 여관을 찾는 중이었다. 그의 말에 납득한 카리나가 다시 침묵하자 조용한 가운데 쥬다의 길 찾기가 이어졌다. 얼마쯤 걸었을 무렵, 중앙 분수의 오른쪽에 초승달이 그려진 여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자로 시야가 가려진 쥬다보다 카리나가 먼저 발견하여 손으로 그 방향을 가리켰다.
“어, 저쪽…….”
“아악!”
그러나 손에 닿는 살갗의 감촉과 고성에 말을 마치진 못했다. 놀라서 옆으로 비켜 갔던 시선을 앞으로 보내자 웬 남자가 눈과 볼 사이를 가린 채 신음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남자가 어찌나 크게 비명을 질렀던지 주변의 몇 사람들이 그들에게로 흘끗 시선을 보냈지만 큰일은 아니라는 듯 지나쳐 갔다. 대신에 남자의 친구로 보이는 몇 명의 남자들이 괜찮냐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당황한 카리나에게 남자가 삿대질을 했다.
“아가씨! 갑자기 손을 들면 어떡해! 애꾸 될 뻔했잖아.”
“괘, 괜찮아요?”
“이게 괜찮은 걸로 보이나? 안 그래도 눈이 칙칙해서 안 좋은 사람을. 어디 보게. 히엑. 왜 이렇게 빨개?”
몸집이 카리나의 두 배는 될 듯한 풍채 좋은 사내가 남자를 살피더니 놀라며 남자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 손짓에 놀라 자세히 다가간 카리나는 남자가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자마자 드러난 벌건 눈에 얼굴을 굳혔다. 실핏줄이 다 터졌는지 오른쪽 눈과 비교하여 색의 대비가 아주 선명했다.
“이거 어떡할 거야? 엉? 이 친구 오늘도 애새끼들 먹여 살리러 일하러 가는데, 이 꼬라지로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냐고!”
“많이 아프십니까?”
카리나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쥬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뒤로 보냈다. 카리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 자신들보다도 눈높이가 위인 쥬다의 모습에 덩치 큰 사내는 조금 당황하더니 얼굴을 사납게 구겼다.
“그걸 말로 해야 알아듣나? 아까 비명 지른 거 못 들었어요?”
쥬다의 등 뒤에서 사내의 고함을 듣던 카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황한 마음이 가시고 나니 찬찬히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손을 올린 건데 잠시 시선을 쥬다에게 둔 그 짧은 사이에 제 손가락은 남자를 찌르고 있었다. 게다가 손끝에 닿은 느낌은 안구가 아니라 볼이나 눈매 끝의 삼각존 부분이었다.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저들은 자신을 유리체와 살갗의 느낌도 구분 못 하는 천치 취급을 하고 있었다.
‘추잡해.’
카리나는 눈을 감고 헝클어진 머릿속을 차분하게 했다. 쥬다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저렇게 응대해 주는 것을 보니 소란을 피우지 않으려는 의도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법에 걸리지 않을 신분증을 가지고는 있으나 엄연히 몸을 숨겨야만 하는 처지였다.
마법사들의 힘이 집중되지 않은 곳이라도 대륙 전체에 공포된 사도들은 신고가 가능했고, 포상금까지 있는 고로 그들은 선량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소란을 피우면 불리해지는 것은 이런 치들이 아니라 자신들이었다.
마침 그들이 있는 곳을 빙 둘러서 걸어가는 할아버지가 혀를 쯧쯧 차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보니 이런 수법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사람들은 그들의 일을 하나의 해프닝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목적은 돈이겠지.’
저치들이 돈을 달라고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원하는 바가 뻔했다. 카리나는 쥬다가 마무리하려는 듯 돈을 꺼내려는 것을 말리고 앞으로 나왔다.
‘저들이 얼마를 요구할 줄 알고.’
돈을 주기 전에 먼저 딴소리를 못 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제가 약을 좀 다룰 줄 알거든요.”
“웃기지 말아. 당신 같은 여자가 주는 걸 어찌 믿……!”
품속을 뒤져 용도에 맞는 주머니를 꺼낸 카리나가 약초 가루를 남자의 벌건 눈 쪽으로 불었다. 수정체에 손상은 없는 걸 보니 분명 눈을 계속 뜨고 있거나 실핏줄이 터지도록 각막을 만지작거렸을 게 틀림없었다. 이들의 수법인가 본데, 그 정도는 고치기 쉬웠다.
“으허억.”
남자가 다급한 손길로 눈을 감싸 쥐었다. 몸으로 사기 칠 자신은 있지만 정말로 몸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다는 의지가 그 필사적인 몸짓에서 선연히 드러났다.
“이년이! 지금 뭐 한 거야! 야, 너 괜찮아?”
남자들이 수선을 피우는 꼴을 카리나는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쥬다는 처음에 그녀가 걸어 나왔을 때 말리려고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의도를 짐작했다는 걸 알았다.
“야, 야. 눈 좀 떠 봐. 좀 보자고.”
사내가 남자의 눈을 가린 손을 치우며 카리나에게 이를 드러냈다.
“계집아, 넌 오늘 우리한테 잘못 걸린 줄 알아라……. 어, 뭐, 뭐야.”
손을 치워 드러난 남자의 눈은 아까의 흉물스러운 모양새가 아니라 오른쪽과 별 차이 없는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덩치 큰 사내가 눈을 크게 뜨고 어리벙벙하게 말을 더듬었고, 각오한 듯 주먹을 질끈 쥔 남자는 그의 반응에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