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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이제 밤에 일 나가는 덴 지장이 없겠네요. 이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드릴게요.”
의원에 한 번 가 볼 정도의 돈을 건네고 그들을 지나쳤다. 저치들이 원한 액수에는 못 미칠 테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상처가 없는데 어쩔 것인가. 카리나는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쥬다를 올려보았지만 그는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 *
“왜?”
오벨테에 첫발을 들인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후였는데 결국 여관에 들어선 것은 달까지 뜬 밤중이었다. 식사 시간과 음주 시간이 교차할 시간대라 식당에 남아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여관이 숙박과 식사를 같이 제공하기 때문에 쥬다는 숙박을 정하기에 앞서 허기진 배를 채울 요량으로 1층에 자리를 잡았다.
“뭐가?”
카리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쥬다가 대꾸하자 카리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그녀 특유의 말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한 거였어?”
순간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쥬다는 곧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아까부터 내내 그녀의 표정이 어둡다 했더니, 계속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야 이년아, 너 이리로 안 와?’
뒤돌아선 카리나의 뒤통수로 날아오는 사내의 손목을 쥬다가 휘어잡았다. 사내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쥬다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뒤돌아 그 광경을 본 카리나가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뭐 하는 거예요? 돈도 줬는데, 왜.’
그녀는 그 말이 사내를 자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갑자기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사내가 손에 든 돈을 땅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내가 이따위 푼돈 받고 감사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이년이 날 거지로 아나!’
이런 상황은 늘 보던 광경에서 엇나갔는지 제 갈 길 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모였다. 어떤 이는 성문 쪽을 향해 뛰어갔다. 사람을 불러오려는 것 같았다. 사내가 이 이상 시끄럽게 군다면 그뿐만 아니라 카리나와 쥬다마저 경비대에 같이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행여나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이 상황은 카리나와 쥬다한테만 안 좋은 게 아니다. 오히려 표면적으로 드러난 상황만을 보자면 저한테 안 좋은 게 확실한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성난 멧돼지처럼 구는 남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우선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상하게 보일 테지만 지금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쥬다 역시 이 자리를 피하는 게 급선무라는 것처럼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걸 본 카리나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차라리 자신이 숙일지언정 쥬다가 저 되먹지 못한 사내에게 고개를 숙이는 걸 보기는 싫었다.
‘차라리 내 눈에 흙을 뿌려!’
눈에 띄지 않게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뺀 그녀가 잰걸음으로 사내에게 다가가 빠른 손놀림으로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비비더니 허리를 숙였다. 마치 처음부터 사과가 목적이었다는 것 마냥 비굴하게 숙여진 고개였다.
‘죄송해요.’
사죄의 말을 꺼내긴 꺼냈는데 더 할 말은 없어 머뭇거렸다. 사내가 어디에 화가 난지도 모르겠고, 어떤 포인트를 잡아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사내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거지 취급 해서 죄송해요.’
살짝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살피자 연신 고개를 잘게 끄덕이고 있다. 문제는 그 눈이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풀린 상태라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오면 눈치챌 터다.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사기꾼 남자와 그 곁의 다른 남자들이 다가오기 전에 속사포로 말을 꺼냈다.
‘용서해 주신다고요. 너그러운 처사에 감사드려요.’
그길로 쥬다의 손을 붙잡고 줄행랑치려는 찰나, 생각보다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남자가 도망가려는 그들을 붙잡으려다 손에 걸리는 로브를 확 잡아 당겼다. 단지 그 사실뿐이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 로브가 쥬다의 것만 아니었다면.
남자가 잡아당긴 것은 하필이면 쥬다의 로브였고, 하필이면 모자가 연결된 옷이었던 탓에 로브가 흘러내리자마자 쥬다의 얼굴이 시선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어라?’
얼결에 쥬다를 붙잡은 남자의 눈이 커졌다. 멍청한 감탄사가 그 입에서 터져 나왔고 동시에 카리나의 입에서는 무시무시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카리나의 빠른 상황 판단력은 그때에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자신의 로브를 벗어 쥬다의 머리 위에 던지다시피 해 그를 가리고, 하나같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쥬다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피해 골목길로 스며들었다. 당초에 가려 했던 초승달 여관엔 눈길조차 주지 못하고 도망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질 때까지, 오후 내내 골목길에 숨어 있던 쥬다와 카리나는 오늘 하루가 너무나도 피곤했다. 특히 카리나는 기존에 입던 옷을 버리고 새 옷을 구해 인상착의를 바꾸는 데도 심력을 소비했던 탓에 입맛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노력은 꽤 효과가 있어서, 금발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게 천으로 꽁꽁 감싸고 여행용 통바지 속엔 높은 굽의 신발을 신은 그녀는 중성적인 느낌을 풍겼다. 어느 정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고는 하나 분명히 그녀와 쥬다의 얼굴을 똑똑히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카리나는 안대를, 쥬다는 드러난 얼굴의 모든 곳을 붕대로 감아 아픈 사람들인 척했다. 괜한 시비를 피하고 싶어 이왕이면 용병 흉내를 내고 싶었지만 쥬다와 카리나 모두 호리호리한 편이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용병처럼은 보이지 않아 포기했다.
밤이 오기를 기다려 겨우 여관에 들어온 그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와중에 카리나의 뜬금없는 말이 재미있었는지 쥬다의 입가 붕대가 위로 움직였다.
“눈도 멀쩡하게 만들어 줬고, 주지 않아도 될 돈도 줬는데. 뭘 더 바래. 이걸 뭐라고 해? 상도덕이 없다고 하지?”
“그건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야. 카리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 알아?”
“정신적으로 상처 입는 거잖아. 예를 들면 내가 당신한테 ‘당신은 아버지의 실력 발끝에도 못 따라가.’라고 말하면 입는 정신적 상처.”
쥬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따박따박 나오는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 이건. 진심이 아닌 거 알지? 솔직히 아버지가 당신 나이대였을 때 실력은 비슷했을 거야……. 아마도.”
망설이다가 붙이는 뒷말에 쥬다는 다시 한번 웃었다.
“너는 그저 알고 있는 것뿐이야. ‘자존심이 상했다’라는 게 뭔지 머리로만 알고 있는 거지. 만약 네가 나한테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면 그래, 나는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카리나. ‘내가 너한테 네 재능은 수재를 넘어서지 않아.’라든지 ‘네 외모는 길거리의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어.’ 이러면 어때?”
카리나는 표정 변화 없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지?”
대답은 없었지만 쥬다는 짐작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야. 아까 그 남자들은 돈도 받았고 몸도 멀쩡해졌지만 네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어.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그 말에 항의하려던 카리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우리가 보기엔 파렴치한이지. 근데 그게 그들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위야. 똥파리한테 왜 그렇게 더럽게 사냐고 하면 말을 알아듣겠어? 미물인데.”
목소리의 고저 없이 말이 이어졌다. 쥬다의 얼굴은 차가웠다.
“그것하고 같은 거다. 네 행동엔 자존심이 상했겠지. 그 정도의 돈을 받고 떨어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거기에 기분 나빴던 거야. 거지 취급 하냐고 화냈었잖아. 말하자면 그들은 사기 치는 행위는 괜찮아도 구걸하는 행위는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는 거야.”
“……끄응.”
“스승님이 네게 부족하다고 한 건 이걸 말씀하신 거야. 카리나, 너는 타인에게 쉽게 공감하지 못해.”
카리나가 불안한 표정을 짓자 쥬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필요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냉혹해질 수 있다는 거니, 우리 같은 신세에는 오히려 필요한 점이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의 말에도 그녀는 안심한 표정을 짓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런 너를 좋아하는 거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새의 사체로 인형을 만들고 있었잖아.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심장을 꺼낼 때부터, 네가 좋았어.”
“뭐?”
“나는 그때 냉정해지고 싶었거든.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 없어.”
아직 완전히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카리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쥬다는 알까? 그를 만난 이후로 자신이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의 고함이 귓가를 맴돌았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침 주문을 받으러 소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음식 맛은 평범했다. 그러나 시장이 반찬이어서 그다지 입맛이 없던 카리나도 막상 음식이 들어가자 식욕이 도는지 빠른 속도로 그릇을 비워 갔다. 음식을 다 먹었을 무렵 여관 주인이 테이블 한구석에 물을 가득 채운 작은 잔을 가져갔다. 식당의 모든 테이블엔 같은 크기의 잔 3개와 어린아이나 쓸 법한 작은 컵 1개가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쥬다가 한 일은 작은 컵에 물을 채워 테이블의 모서리에 놓는 것이었다.
“숙박에 상담, 주문하셨습니다. 식사 끝나셨으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쥬다는 작은 컵을 모서리에 놓음으로써 정보를 사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주인은 상담이란 단어로 승낙한 것이다. 보편적으로 정보를 사기 위해서는 정보 길드를 이용한다. 이 여관은 길드의 지부 중 하나였다.
주인을 따라간 것은 쥬다뿐이었다. 걱정이 됐지만 정보 길드가 의뢰인에 위해를 가하는 건 그들 길드의 금기사항인데다가 쥬다가 함께 가기를 원하지 않아 카리나는 방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씻지도 않았는데 일어나니 의외로 산뜻했다. 옷도 벗겨져 있었고 얼굴도 기름기나 땀으로 끈적한 부분 없이 말끔했다. 힐끔 고개를 돌리자 쥬다가 가벼운 차림새로 잠들어 있었다.
고개를 숙여 입에 쪽 입을 맞추자 그가 스르륵 눈을 떴다. 쥬다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잠이 덜 깬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았다.
“왜 웃어.”
“잠자는 여관의 왕자.”
그녀의 말에 쥬다가 다시 눈을 감으며 픽 웃는다.
“갔던 건 어떻게 됐어? 위험하진 않았지?”
“응. 앞으로 한 달간 갈 수 있는 경매 목록을 제공받기로 했고……. 정보 등급이 C여서, 쉬웠어.”
눈을 감은 채로 착실히 대답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탁자에서 얇은 자료집을 집어 들었다. 쥬다가 그 기색에 상체를 꿈틀했다.
“아, 나도 이제 일어나야지.”
그러나 아직 목소리에 졸음이 가득했다. 자료에서 시선을 뗀 카리나가 고개를 그의 어깨를 꾹 잡아 눌렀다.
“조금 더 자. 피곤해 보여.”
쥬다가 팔을 뻗어 카리나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침대로 눕혀져 쥬다의 품에 안긴 카리나가 눈을 깜박이자 쥬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자.”
안긴 상태로 경매 관련 자료를 읽는 그녀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맺혔다. 그녀는 쥬다가 이렇게 행동할 때마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당혹스러웠다.
‘아, 매일 이렇게 해주면 좋을 텐데…….’
투정은 꾹 눌러 삼켰다.
* * *
그들이 도시에서 하기로 결정한 일은 우선적으로 필요한 재료를 모으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것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일정 기간 동안은 재료를 모으는 데 주력하고 그 이후에는 쥬다가 연구에 매진하기로 했다.
카리나는 이미 쥬다에게 자신은 지하에서 일을 해 보겠다고 밝혔다. 쥬다는 대번에 내키지 않은 얼굴을 했지만 어쩐 일인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또 이건 내 일이라는 말을 할 줄 알고 맘 졸였던 그녀에겐 다행이었다.
암시장의 가장 화려한 중심에서 열리는 경매장은 돈을 가장 중시했다. 그 말은 경매장을 찾는 고객의 신원이 무엇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신 적지 않은 입장료가 필요했으며, 겉보기에 남루하면 입장은 불가했다.
매우 허술해 보이는 터라 도둑들이 몇 번 침입했지만 경매장의 경비들에 의해 찍소리도 못 하고 제압당했다. 교양이 없어 장내에서 난동을 피워도 경비들에 의해 끌려갔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니 슬슬 그 경비들이 평범하지 않음을 눈치채 이제는 가뭄에 콩 나듯이 침입자가 난입했다. 잡힌 도둑들이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풀려났을 적엔 더 이상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게 됐다는 말이 있어 웬만해서는 넘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카리나와 쥬다는 경매장에 출입할 수 있는 옷차림을 점검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