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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빨갛고 풍성한 드레스에 얼굴의 상부를 가리는 나비 가면을 쓴 카리나와 최고급품은 아니지만 저가라고도 볼 수 없는 적당한 급의 정장을 갖추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흰 가면을 쓴 쥬다는 얼핏 졸부처럼 보였다. 귀족처럼 절제의 미덕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화려하기만 해서 덧붙인 것 같은 보석들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었다.
해가 진 밤 시간이라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미리 여관 앞으로 불러 둔 마차는 그들을 싣고 이 밤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 암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말할 수 있었다. 인간의 가장 추접한 면을 보고 싶다면 돈과 사람이 오가는 장소를 찾으라고.
신용도, 신분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경매장은 오로지 돈만 아는 곳인 만큼 돈이 되면 뭐든지 가리지 않았다. 황실에서 흘러 들어온 티아라, 대귀족가에서 훔쳐 온 장물 같은 평범한 것에서부터 왕실의 금지옥엽 공주의 레이스 팬티까지. 경매에 올라오는 물품은 경매장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구분이 없었다.
물건들은 모두 값비싸고 수요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것은 노예 품목이었다. 그러나 노예라고 부르기엔 좀 어폐가 있는 것이 몇몇은 금방 집에서 일어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라며 울부짖는 청년도 있었다.
노예 품목은 길들여진 노예와 그렇지 않은 노예로 나뉘었는데 그 청년은 바로 후자에 속했다. 사회자는 혼란스러워하는 남자의 등에 채찍을 날리며 손님들을 부추겼고, 불법임이 틀림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좋아라고 가격을 올려 댔다.
신분제를 느끼지 못하는 숲 속에서만 살아왔던 카리나는 부조리한 모습에 자신이 있는 곳이 도대체 어디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까지 던지기에 이르렀다. 감정이 무딘 그녀라도 집 안에서 납치당해 저도 모르는 사이 무대에 세워진 사람들의 불행을 태연하게 넘길 수는 없었다.
일이 다 끝나면 왕국이든 제국이든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했으나 이 정도의 경매장이 열리는데 그 윗분들이 모르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거액의 돈을 상납 받고 모른 척하는 메커니즘일 테니. 오히려 신고를 한 그녀가 되레 당할 수가 있어 카리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가면 아래 감출 수밖에 없었다.
경매장을 출입하는 사람이라고 모든 이들이 인신매매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창 경매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카리나와 쥬다는 아직 그들이 찾는 품목이 나오질 않아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았다. 채찍을 맞던 청년이 통통한 볼살을 흔들며 좋아하는 남자에게 낙찰 받은 후 무대에 올라온 사람은 달콤한 금발이 매력적인 소녀였다.
길들여지기는커녕 한 시간 전에 길가에서 납치라도 한 것인지 소녀는 극도의 공포에 젖어 있었다. 크게 확장된 동공 속에 색색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빼곡하게 자리했다. 슬립 같은 한 겹의 얇은 실크 옷만 입은 채 무대에 서 있는 소녀는 화려한 백합 같기도 했고, 청초한 장미 같기도 했다. 모순적인 매력을 한 몸에 담은 그녀는 단련된 카리나의 눈길마저 끌었다.
앞서와 달리 경매는 조용하게 진행되었지만 팻말들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있었다. 어떤 남자는 아예 일어나서 참여하고 싶은지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었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는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쥔 채 무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소녀는 그 시선 앞에서 각양각색의 모든 욕망을 반나체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가련하게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눈물엔 소녀의 모든 감정이 다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에 슬픔을 느끼기에는 더욱더 빠르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게걸스러웠다.
카리나는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그 외의 별다른 감상은 들지 않았다. 저 외모가 망가지지 않도록 점잖은 사람에게 낙찰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였다. 그녀가 더 신경 쓰는 것은 쥬다였다. 모든 남자들이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쥬다는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일말의 불안함을 안고 옆으로 돌린 시선에는 피곤한지 눈을 감고 있는 그가 보였다. 눈을 감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라 슬쩍 한쪽 눈을 떴지만 곧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시 감는다. 카리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쥬다에게는 인형과 자신밖에 없다.
그 사실을 확인받으니 더 이상 소녀에게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만 좀 멈추시오!”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청년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그는 정말 분개한 듯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하관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당신들은 저 소녀가 가엾지도 않소? 태생이 노예도 아닐 테고, 분명 당신네들이 납치한 무고한 사람일 텐데!”
그 열정적인 고함이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건 앞에서 이루어졌던 경매들도 다 마찬가지인데, 왜 이제 와 난리냐는 눈빛이었다. ‘웬 개소리야. 남자가 찢어발겨질 땐 닥치고 있었으면서.’ 카리나는 뒤에서 소곤대는 남녀의 목소리를 듣고 남자에 대한 흥미가 조금 식었다.
소설책에서나 보던 정의로운 사내의 출현인가 싶었던지라 갑작스런 남자의 등장이 재미있었다. 소녀의 흥미나 끌어 보려고 일어난 거면 실망이겠지만.
“이런, 이런.”
한참 올라가는 가격에 흥겨워하던 사회자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잠깐, 곧 과장되게 손을 벌렸다. 어느새 다가온 경비들이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회자가 눈짓을 하자, 경비 중 한 명이 남자의 가면을 벗겼다. 남자는 기를 쓰고 버둥거렸지만 평범한 몸집의 그가 경비를 제지할 수 있었으면, 이 경매장이 이렇게 멀쩡하게 운영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 데미안 자작님이셨군요?”
마치 이제야 알았다는 듯 사회자의 올라간 어투는 다분히 연극적이었다.
“저희 물건에 불만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저번에 낙찰해 가신 클라라 공주님의 처녀 혈이 묻은 침대보는 잘 즐기셨는지 모르겠군요. 이웃 나라로 시집가 다시 보지 못한다는 공주님의 것이라고 아주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노예가 공주님과 비슷한 것도 같네요. 용감한 왕자님이 되고 싶으셨나 보죠?”
시뻘갰던 남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퍼렇게 변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의 거한 비웃음이 그를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는데, 그중에선 남자를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너 이 자식, 그런 어린애 공주 따윈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냐!”
남자는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뒤늦게야 얼굴을 가리고 도망가려고 했다. 그것 역시 경비들의 몸집에 막혀 헛된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감상하듯 보던 사회자가 언제 웃었냐는 듯 싸늘해진 얼굴로 말했다.
“저희 경매장의 원칙은 아시겠지요. 자작님께서 먼저 어기셨으니, 저희 쪽도 지키지 않은 것뿐이랍니다. 그럼, 잘 가십시오.”
그 말이 끝나고서야 경비들은 남자의 팔을 붙들고 문을 나섰는데, 마지막으로 비춘 남자는 울기 일보직전이었다.
카리나는 흥미가 모두 식은 얼굴로 쥬다의 어깨에 기대 차라리 눈을 감았다. 기대하느니 아무것도 안 보는 게 나을 듯싶었다.



CH. 05


운이 좋았다. 경매의 매물은 분위기를 달구기 위해 귀한 매물일수록 뒷순서가 된다. 유독 매물이 나오지 않아 기대를 한 대로 순도가 꽤 높은 생명석이었다. 다만 그 가격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높았다. 아직 크게 부담이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계속된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한 가지 문제점이 해결될 것 같으면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해서이다. 역시 둘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쥬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거면 꽤 괜찮은 품질의 인형을 만들 수 있겠다고 좋아하는 카리나와 달리 덤덤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책에서 봤는데, 여긴 별의별 먹을거리가 다 있대. 양념한 전갈도 있고, 굼벵이도 있고 그렇대. 케이크도 먹어 보고 싶어……. 그렇지만 지금은 좀 그렇네.”
할 말이 없을 때마다 카리나가 꺼내는 화제는 먹거리였다. 어쩐지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조잘조잘 얘기를 꺼내다가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란 것을 깨닫고 눈치를 본다. 쥬다는 어떨 때 카리나가 먹는 얘기를 꺼내는지 알기 때문에 표정을 풀고 미소를 띠었다. 그 표정 변화에 금세 안도하는 그녀가 가엾고 사랑스럽다.

마차를 구해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의 시간은 하늘이 혼탁한 보랏빛의 새벽녘이었다. 기분이 가라앉았던 것도 잠시, 사람이 안 보이는 시간에서야 쥬다와 늘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실감이 들어 설렜다. 거리엔 한 사람도 없었고 여관 역시 빛이 꺼져, 거리는 어두웠다. 마차도 제 갈 길을 가자 환한 달빛 아래엔 두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좋아서 한껏 미소를 지었다.
소설 속에서 많은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술한다. 카리나는 그렇게 표현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얘기할 수는 있었다. 새벽 공기의 쌀쌀함조차 달콤함으로 느껴지는 시간은 쥬다가 저에게 선사하는 선물이었고,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은 쥬다가 그녀에게 꾸게 하는 소망이었다.
카리나는 답답한 가면을 벗고 쥬다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대로 여관으로 들어가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 걸음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거리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으로 나방이 모여드는 광경조차 거슬리지 않았다.
이대로 좀 더 있고 싶다. 카리나는 그런 마음에 쥬다의 관심을 끌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이 밤중에 화제로 삼을 뭐가 있나. 뜬금없이 달이 예쁘다고 해, 나방이 징그럽다 해? 그냥 솔직하게 좀 더 있자고 말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유독 짙은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눈의 사각지대에 어른거리던 기척이 의식을 하자마자 불길한 느낌으로 확 다가왔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쥬다의 팔을 잡아끌려던 때 머리에 강한 충격이 가해져 다리의 힘이 풀렸다.
“아, 안 돼…….”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어제의 그 일당들이 쥬다에게 손을 대는 것이 보였다. 쥬다가 그들을 밀치고 자신을 잡으려는데 남자 한 명이 더 달라붙어 쥬다를 억류했다. 더러운 손이 쥬다의 가면을 벗겼다.
“잘못 본 게 아니었잖아! 완전 상등품을 찾았네.”
눈을 다쳤다고 카리나에게 사기를 쳤던 남자, 게릭이 희열에 찬 눈을 떨었다. 목소리에 가득한 열기가 느껴져 카리나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어떻게 우리를 찾았지? 뒷골목에서 인내했던 반나절의 시간이 한순간에 의미가 없어졌다.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나. 아니면 우연히 찾은 것인가……. 하지만 후자는 가능성이 적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은 계속 저들의 시야 아래 있었던 듯싶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간 것에서 이들의 구역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그들이 지나쳤던 수많은 행인들 중에 이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장담하기가 힘든 것이다. 따져 보니 자신들의 행보엔 허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뼈아픈 실책에 입술을 잘근 물었다.
안이했다. 세상에 처음 나온 티를 너무 냈나.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인 일이라도 계속, 계속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충돌이 생기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더 확실하게 문제를 방지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 정도면 마스터에게 가슴 좀 펼 수 있겠는데? 오늘 그년이 잘 안 팔렸다고 어찌나 지랄을 해 대던지. 아오, 내가 확!”
그들의 대장인 질레빌이 화가 난 기색으로 가슴을 치자 게릭이 얼굴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내가 그년은 그냥 우리가 먹자고 했잖아.”
션은 멍한 얼굴로 쥬다의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쥬다의 흰 피부는 보석 가루라도 뿌린 듯했다. 쥬다는 션 자신만큼이나 키가 큰 데다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표정이었으나 그는 그것마저도 상관하지 않았다.
“……꼭 넘겨야 해?”
“무슨 소리야?”
질레빌이 얼굴을 구겼다.
“난 넘기기 싫어. 보라고, 이걸. 그냥 우리가 가지면 안 돼?”
카리나는 경악했다. ‘안 돼!’ 속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저 사기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인신매매까지 하는 집단이었나. 단순한 사기꾼들이라면 두렵지 않지만 인신매매단은 무섭다. 처절하게 매달리는 인간들을 쓰레기처럼 대할 수 있는 그들의 인성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카리나와 쥬다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다. 자신들이 어떤 피해를 입을지 아니까!
잘못 선택했다. 오벨테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영지의 치안이 이렇게 나쁠 줄이야. 어떤 책에서도 이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인신매매단들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다니.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이 순간 뒤늦게 떠오른다. 주문 제작한 인피면구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다. 핏물이 생길 정도로 입술을 짓씹던 카리나가 머리를 털었다. 그러나 침착하려는 그녀의 노력에도 머리는 어두운 장면만을 그려 냈다.
성교하는 장면으로 몸값을 높이던 창녀, 채찍을 맞는 남자, 반나체로 전시되던 소녀……. 오늘 하루 보았던 경매장의 ‘상품’이 머릿속을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쥬다가 그곳에 세워진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가 솟구쳤다.
“만지지…… 마아!”
그들은 카리나가 이미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는지 경계하지 않아 재빨리 달려들어 쥬다를 억류하는 남자의 팔을 물어뜯을 수 있었다. 머리로는 기절한 척하고 있다가 기회를 노리는 편이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나 몸은 감정에 앞서 행동하고 있었다. 카리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쥬다를 붙잡고 있던 빌터의 팔뚝에도 묻어 나왔다. 빌터가 비명을 지르더니 카리나를 밀어 냈지만 악착같이 팔을 물고 있어 떼어 내지 못했다. 마치 못이 벽에 박힌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질레빌이 그를 타박했다.